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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NDY와 반딧불이 너머로 :
음하영의 <SINGULARITY> 연작 중 ‘<SINGULARITY Series-Curved Vases>’

김솔지 (Double Deck Works)
재즈가 만들어내는 일시적이고 우연적인 리듬. 악보를 따르던 연주는 어느새 즉흥적인 시간으로 옮겨가 새로운 리듬과 템포로 청자에게 예기치 않은 시간을 선사한다. 주어진 규칙으로부터 벗어나는 새로운 질서의 시간, 이것이 바로 재즈가 사랑받는 이유일 것이다. 앞길이 꽉 막힌 것 같은 삶의 순간. 온갖 것이 나를 압도해 벗어날 수 없을 것만 같은 현실에 전환을 일으키는 한 마디가 있다. “언제나 변화의 여지는 있지만, 너는 그 변화에 열려있어야 해.” (“There is always room for change, but you have to be open to that change.’) 부정적인 현실 위로 떨어질 한 줄기 빛을 떠올릴 때 변화는 시작되지 않을까. 그럼 우리는 어디서부터 변화할 수 있을까?

작가 음하영은 유년시절 즐겨보던 만화 속 주인공들의 대사와 광고를 통해 동경하던 장난감 블록의 표면에 새겨진 텍스트 등을 단초로, 매일 새롭고 변화하는 환상의 세계에 접근한다. 작가의 상상은 회화를 통해서 진행되며 ‘이미지’라는 결과로 남는다. 그는 이 이미지를 ‘회화적 가상'이라 설명한다. ‘회화적 가상'은 작가의 회화가 자신의 상상의 과정을 이미지로 기록하기 때문에 나온 표현이라 생각된다. 따라서 ‘실재하지 않는 세계’라는 의미이기도 한데, 여기에는 특정 대상에 대한 재현이 아니라는 뜻도 담겨있다. 실제로 음하영은 하나의 캔버스에 그릴 이미지를 계획하되, 진행과정에서 의도치 않은 표현이 겹쳐지는 우연성을 적극 반영하고, 이 과정에서 사진 등의 이미지를 참조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이유들로 그림 속 대상을 전적으로 허구라고 판명하고, 그의 그림을 ‘가상'이라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 꽃병 역시 허구라면 어떨까. <SINGULARITY Series-Curved Vases> 시리즈의 중심이 되는 ‘Curved Vases(굽은 꽃병)’ 역시 그의 상상 속에서 만들어진 허구의 이미지다.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꽃병'을 보고 그리지 않은 것뿐만 아니라, 음하영의 회화 안에서 ‘꽃병'의 지위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는 그림을 보는 이가 꽃과 같은 이미지가 꽂혀있기 때문에 꽃병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 꽃병과 같은 어떤 형태는 어느 실내의 테이블 위에 놓인 것 같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꽃병처럼 인식되지만, 이 모든 것은 그의 상상을 담은 이미지이며, 어느 것도 명확한 객체라고는 볼 수는 없다. 그의 그림은 특정한 모티프를 단초로 펼쳐진 예외적인 시공간의 기록으로 자리할 뿐이다.

그가 가공한 화면 속에서 명확성을 띄는 것은 반복적으로 선명한 형태로 등장하는 몇 개의 기표이다. “Wendy”, “Express”, “Cranky”와 같은 단어들이 어딘지 모르게 흐르는 가상의 세계에 유일하게 명확성을 획득한 대상으로서 입혀져 있다. 그는 형상 위에 단어를 직접 그리기도 하고, 판화기법으로 입히기도 한다. 그런데 “Wendy"는 무엇일까? ‘설마 그.. 웬디?’ 작가는 어린 시절 보던 애니메이션 <피터팬>에 등장하는 “Wendy”라는 캐릭터의 이름이나 어린이용 블록 듀플로(duplo)에 마스킹된 단어 “Express” 등을 반복적으로 사용한다.


Singularity-WENDY MOIRA ANGELA DARLING,  2022

Acrylic, crayon, paint on canvas
135 x 170 cm | 53 x 66.9 inch



예를 들어 <Singularity-WENDY MOIRA ANGELA DARLING>(2022)에서 그는 허구적인 형상과 그 형상이 배치된 공간을 화면 구성과 투시의 시점, 선명도, 색감 등의 다양한 방법과 요소들로 표현해낸다. 그 이미지의 하단 혹은 가장 바깥에 ‘Wendy’라는 글자를 반듯하게 그린다. 그 위로 ‘파리’처럼 허공을 날아다니는 벌레가 있다. ‘웬디’와 피터팬의 또 다른 친구, 언제 들어도 예쁘고 묘한 감정을 일으키는 ‘팅커벨’이 사실은 반딧불이라는 사실을, 그는 강조하듯 말한다.

음하영은 신체의 감각기관이 발달해가던 어린 시절 자신이 매스미디어를 통해 영향받고, 자신의 감각을 극대화하던 기억을 자신의 감각에 결합한다. 그의 회화작업은 현재의 그가 사회의 시스템과 관습으로부터 자유로웠던 유년시절의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시도와 같다.

그러나 작가는 더 이상 매스미디어가 제시하는 이미지와 소리를 따라 환상에 접근하지 않는다. 그는 반딧불이와 팅커벨 사이의 비유사성처럼, 매스미디어가 주입한 상상의 이미지와 현실 사이의 간극을 인식하고, “Wendy”라는 기표 이미지와 벌레를 닮은 이미지를 한 화면에 기록하는 방식으로, 자신에게 익숙한 감각을 해체한다. 주어진 상상을 깨고 그는 자신만의 세계에 머무는 동안, 푸르른 식물을 화병을 닮은 형상 옆에 거대하게 배치함으로써, 모든 생동감이나 현실성을 이 식물에 투사하고, 나머지 공간의 비현실성을 극대화한다. 자신의 회화가 가상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단서이자 기존의 상상의 질서를 깨트리는 도구로서 텍스트와 식물을 배치하는 것이다.

작가가 지속적인 붓질과 수정 과정 속에서 남겨둔 회화는 감상자에게 익숙하지 않은 이질적인 시지각적 감각을 제안한다. 그림을 보는 사람 역시 작가가 떠난 공간으로 여행할 수는 없다. 최근 1-2년 간 작가가 어떤 세계로 매일 <SINGULARITY Series-Curved Vases>라는 환상으로 떠나서 매번 다른 이야기들을 그려내고 있는지 그 누구도 똑같이 감각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다른 감각적 예민함과 그 감각에 대한 기억을 갖고 있다. 그가 남긴 가상의 이미지, 그가 제시하는 색의 조화와 형상 사이의 균형, 텍스쳐의 질감과도 같은 회화적 표현, 매번 눈길을 끄는 요소들 사이에서, 각자는 무엇을 단초로 어떤 공간으로 떠나게 될까. 그의 회화는 나의 이미지를 보라는 수렴의 공간이라기 보다는 여기서부터 나아가라는 발산의 공간으로 제시된다.




   
A short critique on the recent works of artist Eum Hayoung

미디어를 통해 이미지, 너머의

Images Seen Through the Media, and What Is Beyond

홍경한 (미술평론가)
자연과 사물, 정신과 지각체험을 함의하는 이미지는 인간 자신이 처한 세계에 대한 시각적인 도식화이자 세계에 대한 분석이며 인간 주체의 시선을 실어내는 수단이다. 그것은 단순한 사물의 재현-모사를 넘어 인간 열망(삶과 죽음을 비롯한 기원성과 주술성 등)의 유무형적 표식이고 상징이자 기호이며, 오늘을 살아가는 인간들이 세상과 반응하는 글이면서 그림이고 언어이다.

이러한 이미지의 특성을 가장 효과적으로 파악하는 이들은 예술가이다. 일례로 오랜 역사를 지닌 회화는 한 화면에 화가의 인식작용에 의한 시간의 축적이지만, 그건 단지 기표적인 대상이 아니라 메타포(metaphor)와 상징을 담은 의미체에 가깝다. 동적인 작품들은 실시간의 흐름을 좇아 이야기를 전개하는 서사체로서, 정적인 것과 동적인 것은 어느 하나로 구분되지 않은 채 양자 간 연속성에 근거해 다양한 의미작용을 포함한 문화적이고 정치적인 성격을 띤다.
흥미로운 건 매체의 급속한 발달과 학제 간 결합에 의해 오늘의 시각적 표현은 과거와 확연히 다른 경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매체의 진화가 곧 형식의 범주를 벗어나 미술의 의미체계까지 바꿔놓고 있다는 것이며, 정보미디어의 범람은 가치구분의 낮은 효율성으로 인한 특유의 사변적 감각 경험은 물론, 지배적으로 침투하는 미디어의 영향에 따라 일상의 시지각적 색깔이 달라지고 사회를 이해하는 방식마저 변화될 수 있음을 가리킨다.

작가 음하영의 작업 역시 미디어의 영향에 따라 일상의 시지각적 색깔이 달라지고 사회를 이해하는 방식마저 변화할 수 있음을 텃밭으로 한다. 그는 자신의 작가노트에 “매체를 접할수록 정형화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미디어의 영향력, 일정한 기준과 규범을 제시하는 사회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다”며 “미디어가 제공하는 정보에 일방적으로 노출되면서 그 안의 진짜 이야기는 무엇일까라는 상상을 하게 되었다.”고 적고 있다. 이는 매체에 의한 형식에 대한 관심보다는 미디어의 파급력에 따른 ‘현상’ 자체를 의식하고 문제 삼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작가는 자신의 작품에 대해 “미디어를 통해 본 이미지들의 수집과 이를 이용한 이야기의 재구성 과정에서 얻어진 여러 가지 감정들에 대한 상상의 결과물”이라며, “미디어 콘텐츠의 개인적 재해석의 과정”으로 결론 내리고 있다. 넓게 보면 이 말은 결국 예술은 세계의 일부라는 퐁티(Maurice Merleau Ponty)의 발언과도 맥을 같이 한다. 내적으론 세계란 의식에 의존하지 않을 수 있으나 이미지는 의식에 존재한다는 것을 뜻한다.

실제로 그의 여러 작품들은 미디어에서 차용한 다양한 제품을 비롯해 브랜드 로고, 특정문자, 이미지 등이 뒤섞여 있다. <Curved Vase>(2016)나 <SNOWBALL MAN>(2017)에서처럼 어떤 것은 노골적으로 문자와 이미지의 갈등을 교차시켜 기호성을 드러내지만 또 어떤 것에선 기존의 것을 지워냄으로서 작화적 의도를 강조한 것도 있다.

Hula Guys,  2017  Acrylic, paint on wooden board 150 x 150 cm | 59 x 59 inch Hula Guys,  2017
Acrylic, paint on wooden board 150 x 150 cm | 59 x 59 inch

예를 들면 두 인형이 등장하는 <Hula Guys>(2017)에는 세계 최초·최대의 인터넷서점이자 종합 쇼핑몰인 아마존(Amazon)이라는 로고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서로 다른 문화 간 보이지 않는 연결이 자발적 혹은 비자발적 굴레를 연상시키는 이 작품은 실체란 일정한 시간의 선 위에 존재하지만 각각의 가상공간 아래 그리드 되는 현재를 상징한다는 데 그 의미가 있다. 또한 가공의 상태가 현존성을 포박한 나머지 현실화되는 작금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 현실과 가상의 구분의 철폐, 보임과 드러남의 가치구분에 대한 질문 역시 반영하고 있다. 이미지자체의 가시성에 비해 의도성은 여러 갈래다.
2016년 작품 <Blue Fairy-Kat(You deserve to your wish come true)>도 같은 맥락의 작품이다. ‘블루페어리’는 디즈니 만화에 나오는 피노키오 속 파란 요정이다. 피노키오를 인간으로 만들어 준 게 바로 이 파란 요정 블루페어리이다. ‘Kat’는 세계적인 패션 아이콘이자 슈퍼모델인 케이트 모스를 가리킨다고 하는데, 작품 하단에서 일부만 노출된 ‘You deserve to your wish come true’를 연치하면, 파란요정이 케이트모스에게 어떤 소원이든 다 이룰 수 있음을 지정하는 장면으로 해석할 수 있다. 직선적인 관점에선 그렇다.

하지만 이 작품은 현실과 동화적 상상력, 작가 자신의 관심사가 깊게 반영된 작업이며 내용에 앞서 시각적 구성(composition)에 먼저 눈이 가는 것이 사실이다. 화면을 분할한 것과 색의 병치, 균등한 인상을 심어주는 인물들에서 이미지의 일방성과 통일감을 선사한다. 그렇지만 이 그림은 미디어가 가공한 전통적 이상미, 우상에 대한 이미지를 문화담론의 의미체로 파악하고, 다양한 맥락으로 전개되는 이미지의 언어적 양상과 구조에 관한 의문이 담겨 있다는 게 핵심이다.

이밖에도 반쯤 잘려나간 다이버를 그린 <Divided Diver Jack>(2016)를 포함해, <Horse Mask>(2016), <Nancy & Sally>(2016) 등의 작품들 역시 삶에서 건져 올린 경험들과 기억들, 마음 속 심상, 지각체험 등이 보다 물리적인 표상으로 나타날 수 있도록 돕는 작가적 상상력이 덧대지면서 이성이 이미지로부터 이데아(idea)를 추상하는 힘으로의 전개를 염두에 두도록 한다. 이 가운데 눈에 띄는 작품은 근작 <Sequence-II>(2017)이다. 전투기가 날아가는 배경 뒤로 <Hula Guys>에서처럼 ‘아마존’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 이 작품은 어쩌면 아마존에선 팔지 않는 게 없다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으며, 가공할 무기마저 무차별적으로 소비되어 이미지자체에 대해 무감각해지는 현시대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도 함축되어 있어 보인다. 허나 이미 익숙한 형상을 차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미지자체의 인위성과 전파력, 학습되는 가치에 대한 의문도 고찰해야할 지점으로 남는다.
특히 필자는 이 그림을 보며 ‘학습되는 가치’에 무게를 둔다. 나아가 과거 프랑스 사회학자 장보들리야르(Jean Baudrillard)와 얽힌 일화와 맞닿아 있음을 본다. 그는 걸프전이 한창인 1991년 당시 ‘걸프전은 일어나지 않았다’라는 도발적인 글을 발표해 화제를 모았는데, 그 글에는 우리가 미디어를 통해 인지할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모사된 이미지일 뿐이며, 실제로 미디어 밖에서 걸프전은 일어나지 않았다는 역설적인 주장이 담겨 있었다. 즉, 그는 이미지를 통해 전달되는 전쟁과 폭력은 마치 컴퓨터 오락처럼 비춰지고, 그 고통은 성찰의 대상이라기 보단 오히려 하나의 스펙터클로 소비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같은 선상에서 음하영의 작품 또한 오늘날 이미지가 우리에게 심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Blue Fairy-Kate>를 비롯한 여러 작품에서 드러나듯 의미의 구체적 서술을 지우는 행위를 통해서도 이러한 작가의 역설은 구체화된다. 더구나 인위적으로 덜어내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추상하는 힘’은 의미체로서의 회화를 더욱 견고히 만든다. 비록 외적으론 아이들 그림 같은 여운을 심어주지만 <Sequence> 연작의 계기판 하나, 별 하나, <SNOWBALL MAN>에서의 한 문장까지도 예민하게 설계된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작가는 이를 “의도적인 불협화음이며 예쁜 부조화”라고 말한다. 물론 필자의 관점에선 ‘예쁜 부조화’라기 보단 ‘비교언어’ 체계에 근접하다고 여기지만, 어쨌든 작가가 보고 듣는 세상을 표현하며 “상상력을 위한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주는 비주얼 언어”인 것만은 틀림없다. 무차별적으로 전송되는 이미지 과잉시대를 증거하고 그 이미지들이 비판적 맥락 없이 실재를 압도하는 것에 대한 경각심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도 부정하기 어렵다.

나아가 그의 그림들은 표현 수단이 무엇이든 단순한 도상이나 그림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적, 의미론적, 기호학적 해석과 독해에 따라 매우 다양한 층위를 지니며, ‘아마존’의 기호성이 의미하듯 어떤 단일한 하나의 문화에 종속되기 보단 복잡한 대중적, 역사적, 사회적,정치적으로 다양하게 접근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해석하는 방식에 따라 또 다시 여러 변주로 개간되고 파생되며 해체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다만 음하영의 그림들은 <Sequence-II>에서마냥 고통의 재현물을 담은 미디어가 어떻게 우리의 감수성에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한 혹은 이미지 과잉사회에서 타자의 고통에 대한 적극적인 배려가 필요하다는 것을 거칠게 드러내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의 작품들은 전반적으로 부드러우면서도 이질적인 양자성[1]을 지닌다. 그리고 우린 그 양자적 영역에서 또 다른 결의 이야기를 읽는다. 이처럼 그의 상상력과 호기심에서 출발한 그의 작업들은 이미지와 이미지의 결합을 통해 새로운 이미지를 생성하고, 그렇게 해서 일궈진 이미지들은 미디어에 대한 재조합, 임의적 재구성을 거쳐 낯선 영역으로 옮겨진다. 이후 많은 이들은 작가가 설정-제시한 의미들, 즉 미디어를 통해 본 이미지들의 수집과 이를 이용한 이야기의 재구성 과정에서 얻어진 여러 가지 감정들에 대한 상상의 결과물과 마주한다. 이는 매우 부자연스럽지만 그 부자연스러움이 되레 음하영 작품에 대한 해석의 밀도를 높인다. 이것이야말로 음하영 작업의 특징이라 해도 무리는 없다.

중요한 건 그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있다. 또한 그 메시지가 얼마나 동시대적인지, 공명할 수 있는지가 핵심이다. 여기에 스스로 예술일 수 있음을 어떻게 증명하고 있는지도 관건이다. 다행히 그가 화두로 삼은 것들은 오늘날 동시대인들에게 꽤나 심도 있는 과제를 던진다. 보이는 것과 이해할 수 있는 것에 관한 고찰을 유도한다.

음하영은 여러 상징과 기호를 이용해 동시대 이미지의 파급력과 역할, 가치를 수용하고 나름의 방식으로 해석하며 예술적 주제로 삼는 감수성을 내보인다. 말, 별, 전투기, 사람, 배, 화병 등, 화면에 등장하는 많은 사물들은 하나하나가 이 감수성을 효과적으로 옹립시키는 장치이면서 자신의 주제의식을 명료히 만드는 도구로 존재한다. 더구나 이 모든 장치들은 고의적이며 상당히 치밀하게 계산된 결과이다. 
그런데 이 치밀한 계산이 되레 작가 가슴 속에 내재되어 있는 자율성을 속박한다. 정확히 구분되고 결과로 매듭지어지는 과거의 작업패턴을 엿보게 한다는 사실도 외면하기 어렵다. <Hula Guys>와 <Blue Fairy-Kate>, <Nancy & Sally>라는 제목의 작품에서 일부분 이탈하려는 몸짓이 느껴지고 이성이 감성을 지배하는 상황을 벗어나려는 노력이 가중되고 있음을 목도할 수 있지만 여전히 그의 많은 그림들에는 강한 내레이션과 각주가 존재하며 동화책 같은 서술성을 띤다. 물론 이는 작가의 작업환경, 가치관, 긴 세월동안 축적된 성격에 의해 고착된 것임은 명약관하하다.

하지만 회화성이란 논리와 계산에 앞서 감각이 우선하며 사실상 타자의 견고한 이해의 범주와도 무관하다. 지나친 아이코놀로지(Iconology)는 작품 근원에의 접근을 방해한다. 이론과 논리의 우세는 감성의 발현을 저해한다. 우리가 마크 로스코(Mark Rothko)의 그림을 잘 알지 못하면서도 그의 그림 앞에 서면 눈물을 흘리는 것과 바스키아(Jean Michel Basquiat)의 그림을 보며 무언가 형용할 수 없는 쓸쓸함을 느끼는 것도, 호퍼(Edward Hopper)의 그림에서 삶의 고독이나 외로움, 소외를 새기는 것도 체험의 보편성과 내재율이 공유되고 개방되어 있는 탓이 크다. 굳이 추가하자면 (분야는 다르지만) 올라퍼 엘리아슨(Olafur Eliasson)의 <세상의 모든 가능성>만 봐도 확연해진다.

이들 작품은 설명은 후위이며 감동이 전위이다. 이성의 자리는 어디까지나 창작과정에서의 몫이다. 과정이 회화의 일부로 개입될 까닭은 없으며 드러남에 관한 광활함, 해석의 다양성, 정답으로서의 추론을 해체하는 것이 묘미다. 그러려면 대화의 대상은 나 자신이어야 하며 굉장히 자유로워야 한다. 프레임을 상실할 때 그리는 게 아닌 표현의 근간에 다가설 수 있다. 사물과 현상에 대한 주목은 그 이후다.


Nancy & Sally, 2016
Gloss paint, Acrylic on wooden board. 130 x 89.5 cm | 51 x 35 inches.



그럼에도 비평을 생산하며 희망을 염두에 두는 건 <Nancy & Sally>에서의 탈규칙적인 드로잉, 붉은 배경에 화병이 놓인 작품에서 뿜어져 나오는 공허의 미학, 몇몇 자화상에서 분출되는 내적 리듬과 자율성이 군계일학처럼 존재하고 있었다는 점 때문이다. 그 일부의 작품에서 가장 ‘음하영답다’는 생각을 했던 탓이다. 일례로 <Hula Guys>를 비롯한 <Blue Fairy-Kat> 등의 작품은 그가 걸어갈 향후의 방향성을 매력적으로 지정한다. 습관처럼 반복해오던 이성의 작동을 순간의 지연으로 대체할 수 있는 가능성, 일상에서 걷어 올린 심상의 연상 작용에 관한 믿음, 표상하기를 단념한 뒤에 찾아오는 고유 언어에 대한 확신, 문학적 이미지에 관한 기대를 증거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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